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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Q열전] 중딩 때부터 ‘풀메’하던 소녀, 화장품 그림을 그리다 [꼴Q열전] 조회수 : 36488

[꼴Q열전] 

화장품 그림 작가 김미승 

중학교 때부터 ‘풀메’하던 소녀, 화장품 그림을 그리다 


어여쁜 컬러의 립스틱이 하늘 아래 수만개인데, 정작 바를 수 있는 입술은 하나뿐이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비통함에 눈물짓던 그녀는 고민 끝에 한 가지 묘수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는데…. 그것은 다른 이의 입술에 마음껏 립스틱을 칠하는 것. 사람이 아닌 그림 속 얼굴 말이다.

 

▲ 사진=김기남 기자


김미승(24) 씨는 SNS에 다양한 셀럽의 초상화를 올려 주목을 받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그저 ‘잘 그린 초상화’인 것 같지만 게시물의 태그에는 조금 낯선 단어가 달려있다. ‘#화장품그림’, ‘#MakeupDrawing’. 그렇다. 그녀는 화장품으로 그림을 그린다. 


“고등학교 재학 중 서양화 시험을 볼 때였어요. 아크릴 물감으로 인물을 표현해야하는데, 어렵더라고요. 아크릴 물감을 사용해본 적이 별로 없었거든요. 고민하다가 갖고 있던 비비크림을 사용해 피부를 표현했죠. 물감보다 훨씬 잘 되더라고요. 피부에 바르는 것처럼 한 번에 쓱 발려 피부가 매끄럽게 연출됐죠. 선생님은 그게 화장품인줄도 모르셨어요.(웃음) 그때 처음으로 ‘화장품으로도 그림을 그릴 수 있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물감 대신 화장품 써보니, 발림성 최고! 

미술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그녀는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때문에 남들보다 조금 일찍 얼굴에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막 교복을 입기 시작한 중학교 때부터였다. 엄마의 화장품도 몰래 바르고, 친구들의 메이크업도 고쳐주었다. 비비크림, 아이라이너, 립스틱 등 갖가지 화장품은 그녀의 필수템이었다. 


물감보다 친숙한 것이 화장품이었으니, 수업 시간에 가방 속 화장품을 꺼내 슥 발라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 모른다. 기대했던 것보다 찰지게 발리는 비비크림을 보며 그녀는 ‘언젠가 화장품으로 멋진 그림 하나를 완성하리라’ 다짐했다.  


▲ 사진=김기남 기자


마음속에 꼭꼭 숨겨왔던 꿈을 꺼낸 것은 대학교 재학 중이던 지난 2014년. 아이들이 좋다는 이유로 ‘아동미술학과’에 입학을 했는데, 학과 수업은 그녀의 기대와 많이 달랐다. 그림 수업보다는 보육 이론 수업이 많아 적성에 맞지 않았다. 지루한 대학 생활이 이어졌고, 미승 씨에게는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 필요했다. 그때 머릿속을 스친 것이 ‘화장품 그림’이었다.  


“‘안 쓰는 화장품으로 그림을 그려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우디는 폐품 하나도 소중히 여기며 작품으로 재활용했다고 하잖아요.(웃음) 유통기한이 지났거나, 컬러가 맞지 않아 쓰지 않는 제품들을 그림 그릴 때 사용하는 거죠. 처음에는 색연필로 스케치를 하고 채색에 화장품을 조금 사용했어요. 제가 좋아하는 뮤지션의 얼굴이었죠. 그렇게 그린 그림을 SNS에 올렸는데, 반응이 좋더라고요.” 


세상에 없던 화장품 그림의 등장이라니, 사람들의 관심이 쏟아졌다. 생각지도 못했던 관심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고등학교 때만 해도 촉망받는 학생이었지만, 두 번이나 입시에 실패해 원하지 않는 학교, 학과에 진학한 그녀로서는 새로운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승 씨는 두 팔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화장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 사진=김기남 기자


그림도 메이크업과 같아, 수정 메이크업 필수

종이를 고르는 일부터 신중했다. 피부에 바르는 화장품을 사용하니, 피부와 비슷한 컬러의 종이가 더 자연스러울 듯 했다. 그녀는 흰 종이 대신 노란빛의 크라프트지를 구입했다. 종이 위에 그녀가 좋아하는 셀럽의 얼굴이나 인상 깊었던 영화 속 장면을 따라 그렸다. 


먼저 연필로 밑그림을 그린 뒤 파운데이션, 비비크림 등을 이용해 피부를 표현한다. 피부 표현은 요즘 유행하는 컨투어링 메이크업(얼굴에서 움푹 들어간 부위는 어둡게, 부각된 곳은 더 밝게 연출해 얼굴이 더욱 작고 화사하게 보이는 화장법) 방식과 유사하다. 


입체감을 주기 위해 밝은 색과 어두운 색의 베이스 제품을 적절히 섞고, T존, 입술, 턱, 콧대 등에는 하이라이터와 쉐딩을 사용한다. 고등학교 때 석고 소묘를 하며 얼굴 근육에 대해 공부를 했던 것이 입체감 있는 얼굴을 그리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어느 부분에 음영을 주어야 평면적인 그림이 입체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지 알게 된 것이다. 밀착감을 위해 베이스는 손으로 톡톡 두드리듯 발라주는 것이 핵심. 



베이스가 끝나면 눈을 그리는 작업이 이어진다. 아이메이크업을 하듯 아이라인으로 눈매를 또렷하게 잡아주고 섀도나 립스틱 등으로 채색 작업을 더해준다. 손으로 바를 때도 있고 면봉으로 살살 문질러 발색을 할 때도 있다. 색이 잘못되거나 번지면 파운데이션을 다시 덧발라 지워주면 된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메이크업을 하는 것과 똑같아요. 공들여한 화장도 오후가 되면 날아가 수정 메이크업을 해야 하잖아요. 그림도 한 번에 완성되는 게 아니고 여러 번 반복해서 화장품을 쌓고 또 쌓아야 해요. 화장품은 물감이나 색연필에 비해 밀도가 낮거든요. 한두 번 발라서는 티도 안 나죠. 베이스 제품도 계속해서 덧발라야 원하는 색감이 나와요. 그렇게 색을 쌓는 과정이 꽤 오래 걸려요. 제가 느린 것 같기도 하고요.(웃음) 하나 완성하는데 일주일 이상이 걸리더라고요.”

 

꽤 번거로운 작업이 이어지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화장품을 고집하는 이유는 다른 재료에 비해 훨씬 아름다운 색감을 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 아래 같은 색조는 없다’는 코덕의 신조처럼 수만 가지 컬러의 색조 제품을 사용하면 물감보다 더욱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할 수 있다. 또한 화장품에만 있는 ‘글리터’ ‘펄’ 등은 물감으로 그렸을 때는 절대로 나오지 않는 환상적이고 오묘한 느낌까지 연출한다.   



돈 못 벌어도 팬들이 보내준 화장품은 차고 넘쳐  

대학 졸업 후 그녀의 본업은 화장품 그림 그리는 일이 됐다. 그녀는 화장품 그림을 그릴 때 가장 신나고 즐겁다. 작은 문제가 하나 있다면 화장품 그림으로는 돈을 전혀 벌지 못한다는 것 뿐. 간혹 사람들이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의뢰를 할 때도 있지만, 아직은 자신이 없어 돈을 받고 그림을 그리는 일은 하지 않고 있다. 


“화장품 업체에서 함께 작업을 하자는 제의가 온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다 거절했죠.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는 것을 초고속 카메라로 찍는 작업이었는데, 제가 그림 그리는 속도가 느리잖아요. 못할 것 같더라고요. 요즘은 작업 속도를 높이는 것을 연습 중이에요.”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림을 그리는 재료값은 들지 않는다는 거다. 화장품 그림이 인기를 얻으면서 사람들이 그녀에게 화장품을 지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본인이 사용하지 않는 제품을 보내주는 편인데, 간혹 뜯지도 않은 새 제품을 받을 때도 있다. 


“보내주시는 화장품이 정말 많아요. 립스틱만 몇 백 개는 될 거예요. 처음에는 화장품마다 발색표를 붙여놨는데, 지금은 너무 많아 하지 못하고 있어요. 감사한 마음에 SNS 팬들을 위한 초상화 이벤트를 진행한 적도 있어요. 650명이 신청을 했는데, 그 중 한 분을 뽑아 초상화를 그려 드렸죠. 그림을 받으신 분이 좋아해주셔서 뿌듯하더라고요.” 



미승 씨는 최근 대학원 진학을 계획했다. 대학 때 그림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워 대학원에 진학해 회화 공부를 본격적으로 해볼 생각이다. 그렇게 실력을 쌓아 대한민국 최고의 화장품 그림 작가로 성공할 야망을 품고 있다.   

 

“친구들을 만나면 ‘네가 화장품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은 알겠는데, 언제까지 취업도 안하고 그림만 그릴 거냐’는 얘길 해요. 하지만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그림 그리면 사는 게 좋아요. 앞으로도 계속해서 화장품 그림을 그릴 거예요. ‘화장품 그림’하면 바로 ‘김미승’이 떠오를 정도로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 목표죠. 절대 중간에 포기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글 박해나 기자 phn0905@hankyung.com

사진 김기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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