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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의 청춘만찬] 이재후 김앤장 대표변호사 “남과 같은 길은 경쟁 ‘치열’…내 길을 찾아야” 조회수 : 5452





[캠퍼스 잡앤조이=이진이 기자]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로펌으로 손꼽히는 김앤장 법률사무소. 이재후 대표변호사가 김앤장에 몸을 담은 것이 햇수로 40년째다. 그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판사 자리를 박차고 나와 변호사로 변신을 꾀했다.


김앤장을 1등 로펌으로 키운 원동력은 훌륭한 인재를 영입하는 것에 있다. 초창기에는 판검사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 인재 영입에 애를 먹기도 했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로펌으로 자리매김을 한 뒤에는 공감하는 인재들이 늘었다. 초창기 인재 영입에는 그의 활약도 한몫했다.


지난 18일 서울 광화문 김앤장 법률사무소에서 이 대표변호사를 만났다. 





유년기와 청소년기는 어떻게 보냈나.

“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경남 하동과 창녕에서 군수를 지내셨다. 해방 이후에는 관리직 제안을 거절하고 부산과 양산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교장을 역임하셨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경상도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지금도 형제끼리 만나면 부산 사투리를 쓴다. 아버지가 부산대학교 교수를 지낼 때 6·25전쟁이 터졌다. 인민군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고 연합군이 삐라(전단)를 뿌리면 그걸 주워서 딱지를 만들어 놀았던 기억이 난다. 휴전 이후에 우리 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했다.”


학창시절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중학교 때 ‘학원(學園)’이라는 유명한 학생잡지가 있었다. 그 잡지를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그 잡지를 통해 문단에 진출한 문인들도 많았다. 고등학교 때는 생물반에 들어가 식물과 곤충 채집을 하러 다녔다. 또 운동에는 별로 소질이 없지만, 고2 때 우리나라 최초로 펜싱을 배웠다. 당시 재일교포가 펜싱을 가르쳐주겠다고 해서 몇 명 지원을 받았는데, 동생과 함께 지원해 펜싱을 배웠다.”


어린 시절 공부에 욕심이 많았나.

“아버지가 서울에 와서는 성균관대, 고려대 교수를 거쳐 홍익대 총장까지 지내셨다. 교육자 집안에서 자란 터라 자연스럽게 공부하고 책을 보는 분위기 속에서 컸다. 중고등학교 때는 반에서 1, 2등 하는 우등생이었다. 지금도 튀거나 재미있는 성격이 못 된다. 8남매였기 때문에 아버지는 우리에게 뭐가 되라고 하기보다 각자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하셨다. 재산이 있는 집은 아니었지만 공부하는 집안 분위기 덕분에 형제들이 모두 가고 싶은 대학에 진학했다. 나는 서울대 법대를 수석으로 입학했다. 하지만 3학년 때 4·19혁명이 일어나고 4학년 때 5·16군사정변이 터지면서 수업보다 데모하는 날이 많았던 것 같다.”


고시 공부는 언제부터 했나.

“3학년 때부터다. 4·19혁명 이후에 학생운동에 참여했는데 문득 계속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는 고시 공부를 하러 절에 들어가는 사람이 많았다. 마침 아버지가 정릉에 구입한 15평짜리 작은 집이 있어서 그곳에서 혼자 공부했다. 아쉽게도 3학년 때는 시험에 떨어졌다. 4학년 때는 고시 공부를 하다가 5·16군사정변이 일어났고, 학생운동과 관련돼 한 달간 구속되기도 했다. 수감생활 중 시험 공고를 보게 됐고 무조건 시험을 봐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다행히 시험 전에 석방됐고, 8월에 시험을 쳐서 합격했다. 졸업하고선 바로 군대에 갔다.”




△사진 왼쪽부터 한철호 밀레 대표, 이재후 김앤장 대표변호사, 엄홍길 대장



법관 말고 다른 것을 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

“군복무를 마치고 학교에 가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교수가 되려면 시간이 한참 걸린다. 경제적 여유가 없다보니 판사나 검사를 생각하게 됐다. 판사를 지망해 15년간 대전지방법원, 서울지방법원, 서울고등법원 등을 거쳤다.”


김앤장 법률사무소에 들어간 계기는 무엇인가.

“판사시절인 1976년에 미국 조지타운대학교에 유학하면서 미국 로펌을 찾아다닌 적이 있었다. 한국에선 개인이 변호사 사무실을 차리는데 미국에는 대형 로펌이 있었고 역동적이었다. 변호사 개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차에 김영무 변호사로부터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을 받았고, 1979년 김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갑작스러운 결정에 주변의 만류도 있었을 것 같다.

“부장판사까지 하고 나오는 게 전례였다. 내 경우는 부장판사로 나가기 직전에 사표를 냈기 때문에 주변에서 많이 놀란 눈치더라. 말리는 사람도 꽤 있었지만 그때 결정을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김앤장이 업계 선두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김앤장은 내가 합류하기 전부터 기업법률자문과 국제거래 등 많은 사건을 다뤄왔다. 나는 법원에서 쌓은 경험을 고객 관련 업무에 접목시키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인재를 모으고 전문화시킨 게 주효했다. 능력 있는 인재들이 김앤장에 오고 싶어 하는데, 부모님들의 반대가 있었다. 당시에는 연수원 성적이 좋으면 바로 판검사가 될 수 있었다. 그때 인재를 데려오려고 부모님들을 여러 번 만나 설득했다.”





신조가 있다면.

“고등학교 시절 교훈이 ‘깨끗하자, 부지런하자, 책임을 지자’였다. 교육자 집안에서 평범하지만 정직한 분위기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 말이 와 닿았다. 사회가 깨끗해야하고, 내가 부지런해야 하며, 어떤 일이든 내 책임 하에 한다는 의미다. 서울시에서 청계천을 복원할 때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거나 문구를 적어 구운 뒤, 걸어 놓는 행사를 진행한 적이 있다. 그때 저 문구를 적어서 준 기억이 난다.”


엄홍길휴먼재단 이사장으로 사회공헌 활동도 꾸준히 하고 계신다.

“지난 3월에도 네팔에 다녀왔다. 10년 전에 16개 학교 신축을 목표로 후원을 시작해서 최근 13번째 학교 준공식을 마쳤다. 거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16개 학교로 선정한 것은 엄홍길 대장이 세계 최초 8000미터 16좌 완등에 성공해서다. 네팔에 이미 지어져 있던 학교가 많이 낡아 허물고 새로 짓는 일을 10년간 해왔다. 이 일이 끝나면 학교 보수와 기자재 지원 등을 꾸준히 후원해나갈 계획이다. 네팔에 가보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느낄 수 있다.”


취업준비생들에게 조언 한 마디.

“해방 이후 우리 사회가 여러 고난을 겪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꾸준히 발전을 거듭해 왔다. 1960년대 1인당 국민소득은 80불 밖에 안됐다. 지금은 3만불 가까이 된다. 우리가 젊었을 때는 사회 전반에 부정부패가 심했지만 경제가 크게 성장했기 때문에 누구든 취업을 했다. 지금은 경제적 여건은 좋아졌지만 젊은 사람들이 취업 때문에 고통 받고 있다. 상대적 박탈감도 크다. 하지만 본인이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기회는 열려 있다고 본다. 남들이 하는 대로 똑같은 길을 가려고 하면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본인이 하고 싶은 걸 찾아서 목표를 정하길 바란다. 사람마다 능력, 기회, 운이 다르기 때문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인정할 건 인정하고 어느 정도 주어진 삶에 만족하면서 살면 된다.”    


zinysou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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