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인물

[직업의 세계] “오래된 책에 숨결을 불어넣습니다” 조효은 예술제본가 조회수 : 2551

[한경잡앤조이=장예림 인턴기자]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 위치한 제본 공방. 커다란 프레스 기계에 소음 가득한 보통의 제본업체와 달리 벽면 가득 실과 가죽 그리고 망치들이 즐비하다. “어서오세요 예술제본 공방 렉또베르쏘입니다.” 앞치마를 두른 조효은(42) 예술제본가가 환하게 맞이했다. 예술제본가는 현대식 책 제본 방식이 아닌 전통 방식으로 책을 만드는 사람이다. 낡고 헤진 책을 분해해 한 땀 한 땀 린넨 실로 꿰매고 가죽을 덧댄다. 


동국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던 조효은 예술제본가는 대학교 3학년 때 휴학을 하고 예술제본을 배우기 시작했다. “예술제본은 제가 평생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국내 1세대 예술제본가 故 백순덕 선생의 기술을 이어받아 19년 간 예술제본 공방 ‘렉또베르쏘’를 운영하고 있다. 하루에도 수만권씩 쏟아지는 책들 사이에서 묵묵히 전통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조효은 예술제본가. 그는 “20년 했으니 앞으로 20년은 더 해야 책을 다 알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Profile

조효은(42) 예술제본가

예술제본 공방 '렉또베르쏘(RectoVerso)' 대표

2002.05 아티그램 '앞장과 뒷장'

2009.06 故백순덕 1주기 추모전 '책, 혼을 담다'

2011-2017 France 'BIENNALES MONDIALES DE LA RELIURE D'ART'

2016.05 서울도서관 '책을 짓다'

2020.02 서울도서관 '렉또베르쏘, 앞장과뒷장' (20주년 기념 단체전) 

등 다수



예술제본가는 어떤 일을 하나

“예술제본가는 ‘를뤼에르’라고 하는 불어를 직역한 것으로, 보관할 가치가 있는 책을 보수 또는 복원해 견고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일을 한다. ‘제본가’라는 이름 앞에 ‘예술’이라는 단어가 붙은 이유는 상업적인 제본과 구분하기 위함이다. 를뤼에르가 하는 일 중에 가장 주된 일은 책을 복원하고 보수하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책을 복원한다는 개념은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가

“책을 복원하거나 새로 제본을 한다고 하면 책 표지만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복원이라는 것은 오래된 책을 뜯어서 분해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책을 제본할 수 있는 최소 단위인 ‘대수’ 별로 분류를 하고 실로 꿰매어 다시 엮는 전 과정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책 제본을 맡기시는 의뢰인 중에 ‘책 표지만 바꿔주세요’라고 부탁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런 작업은 가능하면 받지 않고 있다. 기존의 표지만 떼고 새걸로 바꾸는 것은 책의 내구성을 오히려 떨어뜨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구조적으로 책과 표지가 견고하게 연결될 수 있도록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책을 복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공방의 이름이 특이하다 ‘렉또베르쏘’의 뜻은 무엇인가

“‘렉또베르쏘’는 책의 앞장과 뒷장이라는 뜻의 라틴어다. 우리가 보통 책의 앞장과 뒷장이라고 하면 책의 앞 표지, 뒷 표지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렉또베르쏘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책을 딱 펼쳤을 때 오른쪽 페이지가 ‘렉또’이고, 그 뒷페이지가 ‘베르쏘’다. 즉 책 한권은 수많은 렉또와 베르쏘로 이뤄져 있는 것이다.”


예술제본 일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하다

“스물세살 대학교 3학년 1학기 휴학을 하고 우연한 기회에 이 일을 처음 시작했다. 당시 무작정 휴학을 하고 한창 방황을 했다. 경영학부를 전공하고 있었는데, 주로 선배들의 취업처가 은행이나 기업의 전산관리부 쪽이었다. 하지만 저는 그쪽 일을 하면서 평생 즐겁게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TV에서 우리나라 예술제본가 1세대이신 백순덕 선생님께서 예술제본 작업을 하는 모습을 봤다. 방송을 보자마자 ‘저거다!’라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래서 급하게 메모지에 ‘예술제본가 백순덕’이라는 메모를 적어뒀고, 몇 달 후 선생님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던 것이 시작이었다.”


19년 간 ‘예술제본’ 한 길만 걸어왔다. 언제부터 이 일을 업으로 삼아야겠다고 확신이 들었나

“초반에는 큰 기대에 부풀어서 ‘내가 이 일을 얼른 배워서 업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마음이 앞섰던 것이다. 하지만 한 두달 하고나니 예술제본이 얼마나 많은 체력과 인내, 그리고 완력을 요구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4개월 정도 했을 때였다.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때마침 그 시기에 스승이신 백순덕 선생님께서 개인전을 준비 중이셨고, 제가 개인전을 도울 기회가 생겼다. 그렇게 전시 보조를 맡으면서 스스로 실력을 키워갈 수 있었고, 6개월 차에 접어들었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선생님께 사사를 받기 시작했다.” 





책 한 권을 만드는데 걸리는 기간은 평균 어느정도인가

“책에 따라 다르고, 또 제본하는 방법에 따라 모두 다르다. 하지만 보통 한 권당 두 세달은 잡는다.” 


예술제본가의 하루 일과가 궁금하다

“오전에는 수업이 있는 경우가 많아서 2~3시간 정도 제본 수업을 진행한다. 오후에는 개인 작업을 3~4시간 정도 하고 저녁 수업을 한다. 저녁 수업이 없는 날에는 사실 하루 종일 공방에 나와 작업을 한다. 계속 붙잡고 있는 것이다. 수입에 비해서는 일을 많이 하는 편이다(웃음).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전에도 패턴은 지금과 비슷했다. 예술제본이라는 일 자체가 시간을 속일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내가 단축해서 더 빨리 끝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10의 시간을 들여야 하는데, 귀찮거나 힘들다고 8 혹은 9 정도의 시간만 들이게 된다면 결과물에서 금방 티가 난다. 작업 하나하나의 시간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사실 온종일 책과 함께 지내는 것 같다(웃음).”


작업을 할 때는 주로 어떤 생각을 하며 작업을 하나

“제본 일이 숙련이 되기 전까지는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워낙 꼼꼼한 작업이기도 하고, 찰나의 실수라도 생기면 그 하나의 실수로 인해 책 제본의 완성도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에는 제가 작업하는 사방에 검은 막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상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보면 가끔 옆 사람이 말을 걸어도 잘 듣지 못한다(웃음). 하지만 지금은 이 일을 20년 가까이 해 왔기 때문에 충분히 숙달이 됐다. 라디오를 듣기도 하고 팟캐스트 등을 들으면서 작업을 하는 편이다.”


박물관 수장고에 있는 고서 복원 작업도 맡는가

“국내 박물관에서는 사실 어렵다. 예술제본이라는 기술 자체가 서양식 책문화에 기반을 두고 있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서양식 제본과 한국식 제본은 방법과 양식, 재질부터 모두 다르다. 서양의 경우에는 일정규모 이상의 박물관과 도서관에는 전문 제본가들을 고용해두고 있다. 16세기 책이면 16세기 방식대로, 17세기 책이면 또 그에 맞는 방식과 소재, 장식, 실 등을 사용해 알맞게 복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박물관 등의 경우에는 이런 물리적인 복원작업 보다는 화학적인 복원에 초점을 더욱 두고 있다. 때문에 저는 개인 의뢰 고객이 가장 많고, 기업 의뢰도 간간이 들어온다. 영인본을 만들거나 보수복원이 필요한 고서들을 맡기는 식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은 무엇인가

“10여 년 전 일이었다. 한 노신사 분께서 제 작업실에 괴테의 파우스트 초판본 두 권을 들고 오셨다. 상, 하로 나눠져 있는 아주 귀한 발매본이었다. 의뢰인께서는 독일에 거주하시면서 괴테 전집 초판본을 직접 구했다고 하셨다. 그 많은 전집 중에서도 두 권에 나눠진 파우스트를 한 권으로 합쳐 튼튼하게 만들어달라고 제게 의뢰를 하신 것이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세계적인 작가의 초판본을 제본할 기회가 생겨 굉장히 황홀했다. 하지만 동시에 걱정도 들었다. 구하기 힘든 괴테의 전집 중에서 그 두권만 따로 빼서 새로 제본을 하게 될 경우 전집의 가치가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뢰인께 그렇게 말씀드리니, ‘경제적 가치를 따져가며 되팔 생각이 없습니다. 세상에 눈 감는 날까지 이 책을 볼 생각이기 때문에 당신에게 튼튼하게 해달라고 맡기는 겁니다’라고 답하셨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제본가로서 큰 울림을 느꼈다. 이후 의뢰인은 제본 작업을 하는 과정 하나하나에도 세심하게 관여를 하셨다. 또 완성본을 되찾아 가실 때까지 제 옆에서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후배 양성 계획이 따로 있나

“현재 예술제본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수강생들은 주로 40~50대 중년층이 많으며, 이 외에도 20대의 젊은 대학생 친구부터 70대 백발의 신사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있다. 코로나19 여파로 올해 말까지는 수업을 잠시 중단하고 있다. 초급자 코스는 2개월, 중급자 코스는 2년의 기간을 두고 있다. 취미로 배우러 오신 분들도 계시고, 창업을 생각하고 오시는 분도 간혹 있다. 하지만 두세 달 하시다가 포기하시는 분들이 많다. 책을 만드는 기술은 생각보다 지난하고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에도 많은 신경을 쏟아야 하는 작업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2~3년을 한다고 해도 본인이 일정 수준까지 숙련도를 높이기가 힘들다. 최소 4~5년은 꾸준히 배워야 개인적으로 공방을 차려 독립할 수 있는 수준에 오른다.” 


수강생들 혹은 의뢰인들이 맡기는 책의 종류는 어떤 것들이 있나

“본인들이 10여 년 이상 아끼는 책들을 맡기는 경우도 있고, 성경 필사본, 가족사진 앨범, 개인 사진 모음집, 어릴 때 썼던 일기 등 매우 다양하다.” 





현재 개인적으로 작업 중인 책이 있나

“중학교 때 제가 정말 존경했던 은사님께서 선물해 주신 책 『햇빛사냥』을 작업하고 있다. 무선제본(현대식 제본)된 책을 다 뜯어서 실로 다시 꿰매는 기본적인 작업은 마쳤다. 그런데 도저히 표지를 어떻게 싸야할지 결정을 못하겠다. 너무나도 소중한 책이기 때문에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실력이 더 좋아지면 그때 싸야지, 싸야지...하며 미루고 있다. 그 책을 주신 은사님께서 책 안쪽에 ‘결과보다 과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고 적어주셨는데, 실제로 지금 그런 일을 하고 있어 볼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웃음).”


내년에 계획 중인 전시가 있나

“수강 중인 학생들과 ‘괴테와 함께’라는 주제의 전시를 기획 중이다. 내년 초봄쯤 예상하고 있지만, 코로나19 상황을 지켜봐서 더 미뤄질 수 도 있을 것 같다. 이 전시는 출판사와 함께 기획을 한 전시인데, 새롭게 제본을 하기 위해선 멀쩡한 책을 분해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출판사에서 제본을 하기 전 상태의 책, 그러니까 낱장으로 모두 분리가 된 책의 원본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같은 책으로 다양한 제본 방식과 소재를 사용한 작품을 만들어 전시할 계획이다. 또 내년 프랑스에서 열리는 ‘예술제본비엔날레’에 출품하기 위한 작업도 진행 중이다.”


jyrim@hankyung.com

[사진=김기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