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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의 청춘만찬] 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대한민국 창극 사(史)를 다시 쓴 비결은? 조회수 : 7908

[CEO의 청춘만찬]



[캠퍼스 잡앤조이=김예나 기자] 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이 부임한 2012년 이후 대한민국의 창극은 긴 잠에서 깨어났다. 작품마다 공연 애호가는 물론 일반인들도 티켓을 예매하기에 바쁘고, 매진 사례도 줄을 잇는다. ‘창극은 어르신들이나 보는 고리타분한 장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창극 공연을 보러오는 관객들의 연령층이 다양해졌을 뿐 아니라 연극과 뮤지컬, 현대무용 등 다른 공연들의 팬들까지 흡수하고 있다. 


김 감독은 창극을 세계무대에도 올렸다. ‘트로이의 여인들’로 유럽 3개국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치며 현지 관객과 언론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창극 공연을 자국의 무대에 올리기 위한 초청 요청도 10여 개 국에서 밀려들어오고 있다. 


김 감독 부임 이후 대한민국의 창극 사(史)가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극의 위상을 오늘날의 위치까지 올려놓을 수 있던 그만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최근 근황은.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로 유럽 3개국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영국 런던·네덜란드 암스테르담·오스트리아 빈 등 이름난 페스티벌에 초청을 받아 현지 관객과 언론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3개국 모두 처음으로 창극 공연을 페스티벌 무대에 올렸다. 10월부터는 변강쇠타령을 새롭게 재해석한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가 공연된다.”


-2012년 예술감독 부임 이후, 지난 2015년 다시 한 번 임기가 연장됐다. 비결은 무엇인가.


“비결이라 하면 거창하다. 그저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을 뿐이다. 창극이 요즘 핫한 공연 장르가 되었다고 해도, 아직은 창극을 한 번도 접해보지 못 한 국민들이 많다. 문화나 교육은 지속적으로 길게 목표를 가지고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창극에 대한 인식을 바꿨다. 어떻게 가능했나.


“부임 이후 처음 ‘장화홍련’이라는 작품에서 ‘샤워 신’을 등장시켜 당시에 큰 충격을 줬다. ‘장화홍련’은 스릴러 창극을 표방하며, 판소리의 무게를 덜고 현대적인 드라마를 더한 작품이다.  이처럼 스릴러 창극, 청소년 창극, 18금 창극 등 창극을 특성화해 관객의 관심을 끌었다. 한태숙 고선웅 등 연극계의 스타 연출가들을 섭외해 창극을 만든 게 주효했다. 


지금도 창극을 현대적인 요소들과 접목해 새로운 작품들을 개발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하고 있다. 이제껏 창극은 100년 전의 원형을 유지하며 변하지 않고 그 시대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창극은 판소리에서 파생됐지만, 판소리와는 엄연히 다르다. 판소리는 전통 그대로를 지켜나가되, 음악극인 창극은 시대와 함께 변화해야 한다. 패션과도 같다. 유행이 돌고 돌 듯, 그 시대가 필요로 하고 좋아하는 예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발도 심했을 것 같다.


“물론이다. 판소리 요소들을 덜어낸 작품을 본 마니아들은 공연 중간에 자리를 떠나기도 했고, 소리꾼들 역시 기존에 해오던 것들을 바꾸려는 시도를 이해하지 못해 내부의 진통도 있었다. 전통을 해친다거나 망친다는 이야기도 수도 없이 들었다. 하지만 판소리는 판소리답게, 창극은 창극답게 해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고, 오늘날의 관객들이 보고 싶어 하는 창극을 만들고 싶었기에 밀어붙였다. 지금은 다양한 팬들이 창극 공연을 찾고 응원해주신다. 같은 공연을 또 보는 ‘회전문 관객’도 있고.(웃음)”











◁ 김성녀 예술감독은 ‘한네의 승천’의 

한네 역으로 데뷔했다. 사진=국립창극단 제공



-처음 무대에 오르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다섯 살 때 처음 무대에 섰다. 모친은 1950~1960년대 여성국극으로 이름을 떨친 박옥진 여사고, 부친은 극본가이자 연출가였던 김향 선생이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이끌던 유랑극단을 따라 전국을 돌아다니며 천막무대에 섰던 어머니의 아역을 맡았다. 어머니와 아버지에게서 필연적으로 소리와 연기를 할 수 있는 DNA를 물려받았다. 소리와 연기를 배운 것이 아니라, 언제나 보고 듣고 그에 젖어 자랐다. 무대는 언제나 놀이터였다. 큰 의상 바구니가 내 침대였고, 매캐한 먼지 냄새가 내가 기억하는 고향의 냄새일 정도였다. 무대는 내가 제일 잘 놀 수 있는 곳이었다.”


-학창시절은 연기만 하며 보냈겠다.


“당시만 해도 공연 예술자들이 대접받는 시절이 아니었다. 언제나 천대 받고 늘 배가 고픈 직업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내가 선생님이 되길 바라셨다. 초등학생 때까진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중·고등학생 때는 학교만 다녔다. 그러다 집안 사정으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 하게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당연히 대학에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계를 이끌던 어머니가 쓰러지시면서 5명의 동생들을 내가 챙겨야 했다. 동생과 함께 잠깐 가수 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나와 맞지 않았다. 그 후 2년간을 칩거하며 좌절감에서 빠져나오지 못 했다. 그 때 뜨개질을 배웠다.


-그 시기를 어떻게 극복했나. 


“어느 순간 ‘이제 뭐든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나를 치유해준 셈이다. 1970년대 중반 27살의 늦은 나이에 가야금 병창 명인 향사(香史) 박귀희 선생의 문하생이 됐다. 안숙선 명창과 함께였다. 그러다 연극 무대에 오르게 됐고, 그때가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 연출가인 남편 손진책 씨를 만났다. 이후 남편과 함께 ‘마당놀이’라는 장르를 개척했다.”



△(왼쪽 위)마당놀이 ‘뺑파전2’에서 열연하고 있는 김 감독.

(왼쪽 아래) ‘죽음과 소녀’의 빠울리나 역 등 수많은 연극 무대에도 올랐다. 

(오른쪽) 뮤지컬 ‘최승희’에서 김 감독은 동양 무용의 전통을 확립한 최승희라는 위대한 예술가의 

인간적인 고뇌를 표현하며 호평을 받았다. 사진=국립창극단 제공



-마당놀이가 탄생한 과정이 궁금하다.


“당시 남편은 극단 민예에 연출가로 있었다. 1970년대만 해도 서양 연극이 주를 이루고 있었는데, 극단 민예에서는 한국적인 연극을 하자고 했다. 한 방송사에서 시청자들에게 보여줄 공연을 응모했는데, 극단에서 가장 한국적인 뮤지컬을 만들겠다는 포부로 ‘허생전’이라는 작품을 출품했다. 마당은 한 가정에서 가족들이 드나들고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는 공간 아닌가. 그것이 극장의 개념이라고 생각했고, 마당에서 하는 공연이니 마당놀이라고 이름 지었다. 일회성으로 공연을 했는데, 정동극장까지 마당놀이를 보려는 관객들의 줄이 늘어서며 인산인해를 이뤘다. 당시 주를 이뤘던 서양 연극이 아닌, 대사와 몸짓이 모두 우리의 것인 한국적인 연극 공연을 본 사람들은 없었다. 특히 서민들도 모두 볼 수 있는 공연인데다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니 큰 인기를 모았다.”


-30년 이상을 완주하기까지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마당놀이 역시 새로운 장르다 보니, 연극계에서는 마당놀이는 연극이 아니라 하고, 국악계에서는 국악이 아니라고 했다. 새로운 장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인기가 많아지다 보니, 일부에서는 인지도가 있는 유명 배우들을 내세우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하지만 마당놀이는 단순한 연기가 아니라, 소리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해야 한다. 마당놀이 배우들이 갖고 있는 재능이 마당놀이를 만든 것이지, 인기 있는 배우가 만들 수 있는 공연이 아니다. 그저 우리는 천막을 칠 수 있는 터만 있으면 공연을 했고, 마당놀이 대표 배우가 됐다.”






-마당놀이의 의미가 남다를 것 같다.


“우리 부부가 만들어낸 자식과 같으면서, 아픈 손가락이기도 하다. 새로운 장르다보니 창극에도, 연극에도 끼지 못 해 인정받기가 힘들었다. 마당놀이를 30년을 했는데, 번역극이나 뮤지컬 등으로는 상을 많이 받았어도 마당놀이로는 한 번도 받지 못 했다.(웃음) ”


-마당놀이 공연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원래 마당놀이를 시작할 때, 30년만 해보자고 약속했다. 그래서 마당놀이 탄생 30년이 되던 2011년에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당놀이를 접었다. 많은 분들이 아쉬워 하셨다. 그러다 2012년 국립창극단에 온 것을 계기로 국립극장에서 마당놀이를 부활시켰다. 요즘은 젊은 배우들이 무대에 오른다. 마당놀이 2기가 시작된 것이다. 전통의 맥을 이으며 하나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냈다는 자부심이 있다.”


-후학 양성에도 힘을 쓰고 있는데.


“마당놀이로 한창 바쁘던 때 뒤늦게 학업의 길에 접어들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대학에 가지 못한 한이었을까.(웃음) 당시 마당놀이를 하며 마당놀이의 모태였던 전통연희에 대해서도 궁금한 점이 생겼다. 또 가장 한국적인 마당놀이에 대해 잘 알지 못 하고 서양 연극만 우러러보는 사람들의 인식도 바꾸고 싶었다. 서양의 것과 비교해서 우리 것이 어떤 점에서 특별하고 소중한지 대학에서 공부하다 교수까지 됐다. 또 음악극과를 신설해 소리꾼과 배우들을 뽑아 한국적은 음악을 할 수 있는 배우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했고 그 제자들이 오늘날 주역이 되었다. 나 또한 우리 음악극이 가야할 길을 교육 현장에서 배웠다.”


-무슨 일이든, 한 가지를 시작하면 끝을 보는 것 같다.


“언제나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단순히 배우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프로 수준이 될 때까지 한다. 20대 때 좌절감을 이겨내기 위해 배운 뜨개질이 전문가 수준의 실력이 되어 두 권의 책까지 출판하게 됐다. 체력관리를 위해 등산을 시작했다가 네팔 안나푸르나까지 등반하게 됐다. 마당놀이라는 장르를 만들어 30년간 무대에서 오르다 뒤늦게 학업의 길에 발을 들여 이제는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자가 된 것도, 모두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나의 집념에서 비롯됐다.(웃음)”





-앞으로의 계획은.


“마지막까지 배우로 남고 싶다. TV나 영화 출연도 물론이다. 연기를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생각이다. 나에게 가장 잘 맞고, 내가 가장 좋아하고,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시대의 청년들에게 한 마디 해달라.


“우리는 배고픈 시대에 태어나 고난을 극복하는 것을 밥 먹듯 했다. 오늘날의 청년들 역시 어려움이 많겠지만, 조금 더 긴 호흡으로 가길 바란다. 어려움이 있다고 빨리 포기하지 말고, 그런 일들을 겪을 수 있는 내공을 길러야 한다. 오늘이 끝이 아니라 내일을 충분히 살았으면 한다. 나 역시 앞에 길이 보여서 간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일을 했더니 길이 생기고 문이 열리고 또 새로운 길이 생겼다. 오늘이 끝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가길 바란다.”


yena@hankyung.com

사진=이승재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