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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만원 알바’로 시작해 ‘월 800만원’ 저축하는 태권도 관장이 되기까지 조회수 : 31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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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안주셔도 좋습니다. 대신 학부모 상담에만 들여보내주십시오.” 대학생 박준호(32)는 태권도 도장 아르바이트 면접에서 급여 포기 선언을 했다. 그에게 아르바이트는 ‘돈을 버는 곳’이 아닌 훗날 관장이 되기 위한 중요한 시작점 그 자체였다. 10년 뒤, 박 씨는 학생 수 300명 규모에 강의료 수입만 월 수천만 원에 달하는 나름 성공한 도장의 관장으로 성장했다.



어릴 때부터 꾸던 꿈을 10여년 만에 현실로 이룬 박준호 관장을 그의 도장이 있는 경기도 용인시에서 만났다. 사진=이승재 기자



“내 소원은 너처럼 운동장에서 마음껏 뛰어보는 거야.”


중학교 2학년의 박준호는 사춘기를 호되게 겪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축구를 좋아해 초등학교 3년,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선수로 활약했지만 몸이 힘들다는 이유로 아버지께 운동을 그만두겠다고 통보했다. 


아버지는 별 말씀이 없으셨다. 하지만, 작은 아버지는 달랐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얻은 하반신 마비 탓에 10년간 꼼짝없이 누워계시던 작은 아버지는 어느 날, 그를 앉혀두고 나지막이 운을 띄웠다. “내 소원이 뭔 줄 아니? 단 하루라도 너처럼 운동장에서 마음껏 뛰어보는 거야.” 그날 밤, 중학생 박준호는 밤새 펑펑 울었다.


하지만 이미 포기선언을 한 축구부에 다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다른 길을 찾다 당시 주변 친구들이 많이 하던 태권도로 눈을 돌렸지만 중2에게 가장 초급반인 흰 띠는 많이 늦은 축에 속했다. 다행히 오랜 세월 축구로 다져진 체력과 근육 덕에 남들보다 발전 속도가 빨랐고 관장에게 추천서를 받아 일반 고등학교의 선수전형으로 입학했다. 


하지만 아직 그의 실력은 모자랐다. 당시 공부를 굉장히 잘했던 막내삼촌은 “난 12년을 꼬박 12시간씩 공부했다. 너는 고작 3년만 하면 되지 않느냐. 이종범 선수는 훈련이 다 끝난 상태에서 혼자 남아 1000개씩 배팅연습을 했다더라”며 훈계했고 깨달음을 얻은 그는 모든 훈련이 끝나는 9시 후에도 한 시간씩 더 개인운동에 매진했다.


그 결과, 고2~3때는 전남 도 대표에 발탁돼 메달도 거머쥐었다. 대입도 순조로웠다. 물론 수능 성적이 필요했기에 대회가 끝난 뒤 수능까지 남은 한 달 동안 급히 학원을 다녔고 400점 만점에 150점을 받았다. 당시 지원자의 평균 성적이 100점 언저리였기에 그는 40명의 지원자 중 2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경희대 태권도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아르바이트 월급 60만원… 돈 보단 꿈 택했다


입학 후 얼마 뒤, 교수님은 “대학은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곳이기에 모두 시작점이 똑같다”며 그에게 공부를 권유했다. 당연히 자신은 공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박 씨는 교수님의 이 조언으로 희망을 얻었다. 처음에는 진도를 따라가기도 벅찼지만 운동으로 다져진 집중력 덕에 곧 공부에 재미를 붙였다. 3~4학년 때는 4.5점 만점에 4.3점을 받아 교내 전체 2등으로 장학금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꿈은 따로 있었다. 바로 태권도 관장이 되는 것. 1학년 때, 친구를 따라 놀러간 400명 규모의 한 대형 체육관에서 관장의 리더십에 매료된 뒤부터였다. 꿈을 이루기 위한 첫 단계는 아르바이트였다. 첫 방학, 그에게 영감을 줬던 바로 그 도장을 다시 찾아 “돈을 한 푼도 받지 않을 테니 사범으로 써 달라”고 부탁했다. 


돈보다는 운영 비결을 가까이에서 배우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평균 급여의 절반인 60만원을 받고 청소부터 시작했다. 관장을 스승으로 모시며 곧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게 됐고, 부모 상담에도 참여했다. 커피도 타고 심부름도 해가며 한쪽 구석에서 열심히 상담 노하우를 익혔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소규모 체육관도 찾아가보기로 했다. 여러 곳을 모두 발로 뛰며 각각의 운영방침을 공부했다.  


“답은 두 가지였어요. 지리적 요건과 관장님의 경영철학. 특히 제 스승 관장님의 철학은 수업은 집에 도착해 부모님께 ‘다녀왔습니다’라고 인사하기까지라는 것이었어요. 즉 인성을 가장 중시한 거예요.”


그는 이 방식을 그대로 모방했다. 단독 수업을 할 때는 말투까지도 따라했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관장의 장점만 흡수하고 단점은 대체해 자신만의 리더십을 갖게 됐다.  


2학년 2학기에는 교내 겨루기 대회에서 우승해 뉴멕시코주립대학 태권도 수업 보조로도 파견됐다. 생활비와 항공료를 전액 지원받고 보조 교사로 일했다. 보수는 1천 달러. 수업이 없을 때는 근처 학원에서 한국인 관장을 도와 학생을 가르쳤다. 


미국에서는 겨루기가 특히 인기였기에 겨루기 전문인 그를 찾는 학생도 많았다. 귀국 직전, 관장은 고맙다며 보름간 함께 여행을 제안했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추가 근무 제안도 받았지만 그는 더 큰 꿈을 위해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2008년 여름, 졸업을 앞두고 그의 스승 관장이 수석사범을 제안하며 400명의 학생을 맡겼다. 2년 뒤, 조용히 그를 부른 관장은 “집에서 어느 정도 지원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박 씨의 부모님과의 식사자리를 마련한 관장은 직접 “아들이 체육관을 차릴 수 있게 도와달라”며 간청했다.


이 덕에 박 씨는 아버지에게 5천만 원을 지원 받고 나머지 5천만 원을 대출로 마련해 동탄의 60명 규모 체육관을 인수했다. 마침내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매달 800만원 저축… 부모 곁 떠나도 잘 살 수 있게 만드는 게 목표


“막상 관장이 되고 나니 사범일 때와는 또 다르더라고요. 첫 1년 동안은 정말 힘들었어요. 차량 운영 문제부터 학부모를 대하는 것까지 실제는 너무 달랐죠. 그러다 ‘일단 아이들부터 잘 가르치자’라고 결심하고 모든 전단 광고를 끊고 교육에만 매달렸어요.”





입소문의 힘은 컸다. 한 바퀴를 돌고 난 뒤, 그의 도장에서 어느덧 두 배인 120명이 태권도를 배우고 있었다. 결혼도 했다. 다시 1년 뒤, 하지만 더 이상의 변화는 없었다. 곧바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고, 곧 현재의 용인시 120명 규모 체육관을 인수해 새롭게 시작했다. 


“새로운 도장을 운영하면서도 '아이의 실력부터 키우자'는 경영 철학은 변함 없었어요. 무조건 띠에 맞는 실력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50분은 제대로 태권도를 가르치고 나머지 10분은 공놀이나 쥐잡이 같은 놀이를 하고 있어요. 즐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갈 수 있게 하는 거죠.”


그의 또 다른 경영철학은 ‘디테일’. 혹시나 수업이 늦어지면 부모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아이가 조금 늦게 도착할 것 같으니 추운데 미리 나와 계시지 말라”고 배려한다.


매출은 어느 정도일까. 첫 도장을 위해 빌린 5천만 원은 2년 만에 갚았다. 현재는 학생 수를 300명으로 늘렸고 매월 저축하는 돈만 800만원에 달한다.


“제 교육목표는 학생들이 성인이 된 뒤, 부모 곁을 떠나서 잘 살 수 있게 하는 거예요. 태권도는 나중에 어떤 직업을 갖더라도 탄탄한 기본이 돼주죠. 또 아이들이 바른 정신과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사회생활 할 수 있게 해줘요. ‘태(跆)권(拳)’만 배우고 ‘도(道)’를 배우지 않으면 깡패에 불과하거든요. 최종 꿈은 태권도를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을 무료로 가르치는 거예요. 우리나라의 상징 격인 태권도를 전 세계에 전파하고 싶습니다.”


사진 이승재 기자

이도희 기자(tuxi012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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